제목 : 김성수(46회) 고금미술연구회 회장 등록일 : 2018-08-22    조회: 5503
작성자 : 사무국 첨부파일:

고 구본흥 대구백화점 회장의 뜻에 따라 고금미술연구회 선정 작가 전시회가 무료로 열리고 있는 대백프라자 갤러리에서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김성수 회장. 김성수 고금미술연구회 회장(한국해비타트 대구·경북 이사장)은 퇴임 이후 20여 년 동안 활발한 사회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비결에 대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힘차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보람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노익 대기자 noik@msnet.co.kr

 

요즘 가장 부러움을 사는 이들 중 하나가 '현역 때보다 더 빛나는 퇴임 후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누구나 아름다운 제2·제3의 인생을 꿈꾸지만, 솔직히 바람이 현실이 되기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평생을 권력기관에 몸담았었다면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몸에 밴 체질(?)이 상황이 바뀌었다고 쉽사리 변하지 않는 탓이다.

김성수(78) 고금미술연구회 회장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좀 특별하다. 33년의 검찰 생활을 마치고 2000년 대구고등검찰청 사무국장(1급)으로 퇴임했지만, 여전히 사회적 주목과 관심을 받고 있다. 검찰 수사관 출신이라는 경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향토 미술 후원단체인 고금미술연구회 회장과 해비타트 대구·경북지회 이사장으로서 그의 활동은 빛이 난다.

김 회장은 퇴임 전, 사무실 탁자 보자기 위에 작가불명의 시(詩) '늘 처음처럼'을 적어 놓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처음으로 하늘에 안기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어린 싹처럼/ 우리는 하루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처음처럼 아침처럼 시작하는 것이다.'

◆ 저승사자, 검찰수사관

김 회장은 1967년 대구지방검찰청에서 검찰서기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경력의 대부분을 대구에서 보냈다. 대구경북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 중 상당수가 그의 손을 거쳤다. 특히 사회지도층, 지식인, 돈 많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한 화이트 컬러 범죄 수사에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1971년 국보급 문화재 도굴 및 판매 사건이 먼저 기억이 납니다. 두 달 넘게 서울 인사동 등을 동료들과 누비면서 문화재 도굴범의 계보와 판매조직을 파악했는데요. 이때 문화재 관련 거상이었던 신모 씨를 구속하고, 유력 재벌총수의 친형인 이모 씨를 최종 취득자로 입건해 시가 10억원 상당의 고려시대 주전자를 국가에 환수했습니다. 그 문화재가 국보 603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결혼을 한 뒤 집사람과 국립박물관을 갈 기회가 있었는데, 이 국보 앞에서 총각시절 무용담을 이야기 하며 뿌듯해 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경북교육위원회 진정사건도 지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의 동기동창인 교육감의 직무유기와 가짜 및 무자격 교사 100여명을 밝혀냈고, 이중 자수자를 제외한 가짜 교사들을 무더기로 구속했다. 1980년대에는 교통경찰관의 정기상납 비리를 밝혀내 대구시내 4개 경찰서에서 28명을 적발했다. 의사·약사 등 전문직 비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구지검 수사과장 시절에는 불법의료행위, 약품제조 판매행위 등을 기획 수사해 입건한 의사·약사가 50여 명이나 되었다. 공직자비리사범 특별단속에서는 5급 이상 공무원 등 25명을 인지 구속했다.

 

소위 '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김 회장의 칼날이 강해질수록 반발과 반작용도 컸다. 온갖 모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91년에는 사정기관으로부터 암행감찰 대상이 되었다.

"이 때 '진실은 결국 이긴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정기관의 철저한 암행감찰 결과, 오히려 모범공직자가 되었고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께서 직접 치하 서신을 보내주셨습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해졌죠."

◆ 정(情)에 약한 검찰 직원

자신의 힘과 권력을 믿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에겐 저승사자와 같았지만, 사실 김 회장은 정에 무척 약했다. 1982년 거창지청 사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인연을 맺은 어인분교와의 교류는 1993년 가북초등학교에 통폐합될 때까지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어인분교는 거창군 가북면 어인리 해발 500미터에 위치한 아주 작은 학교로 전교생이 5, 6명에 불과했습니다. 매년 2, 3회 방문하며 비옷, 장화, 학용품, 과학교재, 놀이기구 등을 선물했는데요. 주위에 소문이 나자 함께 동참하겠다는 친구들이 생겨 작은 소모임까지 생겼습니다. 바다구경을 소원하는 아이들을 위해 경주, 포항 등지로 수학여행을 주선해 주었던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분교장이 다른 학교로 전근가면서 새로 간 학교에 피아노가 없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거창군 주상초교와 밀양군 상동초교, 의령군 낙서초교에 각각 피아노를 한 대씩 선물했다. 덕분에 이 학교들은 군내에서 유일하게 피아노를 가진 초등학교가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초등학교는 겨우 오르간을 보유했을 뿐이었다.

◆ "미술을 품다"

"1977년쯤이었습니다. 솔직히 학창시절 그림을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림이라는 것이 한없이 어렵고 난해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미술품이라는 것이 상당히 고가였기 때문에 관심이 있어도 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중앙파출소 앞 찻집에서 차를 마시다가 '그림'이 주제가 되었고, 이왕 그림에 관심이 있다면 제대로 한 번 배워보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처음 뜻을 같이 한 사람은 정원영 초대 영남대병원장, 남용진 대구적십자사 지사장, 김은집 변호사(당시 판사) 등이었다.)"

신진욱 협성재단 이사장이 시내 중심가의 사무실을 빌려주어 매달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아지트가 생겼다. 작가와 대학교수들을 초청해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김동구 금복주 사장이 관심을 보이면서 사무실을 삼덕동으로 옮겼고, 작가와의 대화 등 현장 방문이 더 활성화 되었다.

"고금미술(古今美術)이란 용어는 '옛것과 오늘의 미술을 고루 접하며 시대의 조류에 편중됨이 없이 일관된 예술적 철학을 가진 예술가와 미술을 만나자'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초기 회원은 10여 명 정도였는데요.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경제인, 법조인, 평론가, 이론가 등이 미술이론과 동서양 미술사, 현대미술을 배우기 위해 마련한 일종의 '미술을 통한 미술을 위한 사교모임' 성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 한국 메세나 운동의 시초!

미술 동호인의 사교모임이었던 고금미술연구회는 1989년 '고금미술 작가 공모전'을 시작하며, 지역 미술계 유망주를 발굴·후원하는 메세나 활동의 주체로 변신했다. (메세나란 용어가 처음 국내에 들어온 것은 1994년이다.) 고금미술연구회와 같은 활동은 아직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하다.

"대구는 서울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미술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도시입니다. 이인성 이쾌대 등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유명화가들을 많이 배출했고, 지금도 매년 2천여 명의 미술인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의 신진작가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고, 그것이 바로 '고금미술 작가 공모전'이었습니다."

때문에 고금미술 작가 공모전은 '대구경북에서 활동하는 만 18세~35세 개인전 경험이 없는 구상 계열 신진작가'로 대상이 제한된다. 고금미술연구회가 구상 작품을 중시 여기는 배경에는 구상이 모든 미술의 기초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젊은 작가들이 이를 발판으로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고금미술 선정 작가에게는 첫 개인전을 열어주는 특전이 따른다. 개인전 준비금과 창작지원금, 언론홍보 등이 혜택도 함께 주어진다.

"처음 시작할 때 구본흥 대구백화점 회장이 전시장을 평생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고금미술 선정 작가의 첫 전시회는 지금도 대백프라자 갤러리에서 '무료'로 열리고 있습니다. 한편 연령제한에 걸려 출품을 못하는 지역 우수 작가들을 위해 '초대작가'를 선정하는 등 지역 미술계 발전을 위한 다양한 노력도 하고 있습니다."

 

김동구 (주)금복주 회장, 구정모 (주)대구백화점 회장, 오유인 동일철강 회장, 김신길 아세아텍 회장, 김세영 ㈜삼원 대표이사(경산상공회의소 회장) 등 50여 명의 지역 내 저명인사들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성장해온 '고금미술 작가 공모전'은 이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견작가로 발돋움하는 도약대가 되었다.

제24회 대한민국미술대전 문화관광부장관상을 수상한 박성열과 평론가상을 받은 김대섭, 금강MBC미술대전 대상 도성욱을 비롯해 김성호, 윤병락, 김대연, 조홍근, 강주영, 김성진, 류채민 등 고금미술 선정 작가들이 우리나라의 구상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작가들은 초·중·고 교과서에 등재되고 있으며, 해외활동도 왕성해 홍콩 크리스티·뉴욕 소더비 등에서 명성을 얻고 있다.

2001년 8월 8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내외가 경산현장(40세대 입주)을 방문, 당시 이의근 경상북도지사(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제4대 한국해비타트 대구·경북 이사장), 정근모 박사(앞줄 맨 오른쪽, 한국해비타트연합회 창설자)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김성수 회장 제공

◆ 해비타트, 가정을 찾아주다

김 회장이 고금미술연구회와 함께 퇴임 후 심혈을 기울여 하는 또 다른 활동으로 해비타트 운동을 들 수 있다. 사랑의 집짓기 국제NGO봉사단체인 해비타트 대구·경북지회 창설 멤버였고, 2009년 4월부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특히 지난해 12월에는 한국 해비타트의 새로운 역사를 만든 인물로 인정받아 국내 1호 '히스토리 메이커'로 선정되었다.

"퇴임을 2년 정도 앞둔 때였습니다. 현직에 있을 때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는 듯 분주히 살아왔다는 느낌을 갖곤 했는데요. 퇴임 후 남은 긴 삶을 '가슴이 있는 삶' '더불어 사는 세상을 실천해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해비타트를 알게 됐습니다.

김 회장은 "해비타트는 단순히 집이 없는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는 그런 일을 하는 곳이 아니다"면서 "주거문제가 해결되면 삶의 의지를 회복할 수 있는 가정을 대상으로 선정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부사장으로 근무하는 호텔에 전 재산을 투자했다가 호텔 운영이 어려워지자 오갈 데가 없어진 사람이 이었습니다. 이 분이 전기·수도가 끊어진 호텔 건물 13층 방 1칸에서 1년 간 비참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해비타트에서 20평 남짓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었는데요. 입주식 날 '해비타트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다'는 인사말을 해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분은 지금 새 직장을 다니며 안락한 가정을 꾸미고, 해비타트 마을의 대표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해비타트의 정신입니다."

김 회장은 2015년 11월 해비타트 입주식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한 부모가정의 4자녀가 청소년쉼터, 시설업소, 친척집 등에 뿔뿔이 흩어져 생활해오다, 해비타트에서 마련해준 보금자리 덕분에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식사를 함께 하는 모습을 지켜본  것이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을 쏟으며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가슴 뭉클한 감동이 몰려왔다는 설명이다.

사실 김 회장은 1941년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제징용 되어 3살 때 전사했고, 6살적에 어머니의 고향인 대구로 와 유복자 여동생과 함께 3식구가 어렵고 힘든 시절을 보냈다. '집 없는 사람들의 설움'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하고 느낀 김 회장인 만큼 해바타트 운동은 단순한 봉사활동 이상이었다.

◆ 디딤돌 사업의 보람

"디딤돌 사업은 해비타트 대구·경북지회의 자랑입니다. 도심 속에 흉물로 방치된 빈집을, 집수리 조건으로 주인으로부터 무상으로 일정기간 빌린 뒤 저소득층에게 빌려줘 집세부담을 덜어주어 자립의 길로 안내하는 사업인데요. 새 집을 지어주는 사업에 비해 적은 비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디딤돌 사업은 순전히 공짜는 아니다. 저소득층으로부터 아주 저렴하기는 하지만 일정한 임대료를 받기 때문이다. 더 특이한 것은 5년 동안 모은 이 임대료는 세입자가 집을 떠날 때 자립자금으로 되돌려 받는다는 점이다.

"디딤돌 사업이 입소문을 타면서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푼돈을 모은 어린 학생들에서 수 억 원에 이르는 뭉칫돈을 보내주시는 후원자, 그리고 수많은 자원봉사자 덕택에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의 땀과 노력이라는 아름다움에 묻혀서 큰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고금미술연구회와 해비타트 활동을 해오면서 제 가슴에 스며드는 따사로움이 가장 큰 위안"이라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힘차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보람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프로필]

▷대구 성서초교 ▷계성중·고 ▷청구대(현 영남대) 야간부 ▷부산지방검찰청 거창지청 사무과장 ▷대구지방검찰청 수사관, 공안과장, 서무과장, 수사과장, 조사과장, ▷대검찰청 집행과장 ▷대구지방검찰청 사무국장 ▷부산고등검찰청 사무국장 ▷대구고등검찰청 사무국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경상북도 공동모금회 감사 ▷고금미술연구회 회장(현) ▷한국해비타트 대구·경북지회 이사장(현) ▷녹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 ▷금복문화상 ▷삼일절 기념 장한 문화인상(금상)

 

석민 선임기자 sukm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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